A Memorial to the Wilhelm Gustloff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이야기 May 5, 1937 Launched.
1937년 5월 5일, 진수. Mar 15, 1938 Commissioned.
1938년 3월 15일, 취역. Apr 2, 1938 Maiden voyage, cruising in the North Sea as a KdF (Strenght through Joy) ship owned by the DAF, but managed by the Hamburg-South America ship line.
1938년 4월 2일, 처녀항해 실시. DAF의 소유인 KdF(기쁨의 표현 - 나치당 소속 여흥관련 기관?)의 배로서 북해 항로를 다녔지만, 기실 함부르그-남아메리카 해운에 의해 운영되었다. Apr 3, 1938 The Wilhelm Gustloff received a distress call from the Pegaway, a sinking British cargo ship in need of help off Terschelling.
1938년 4월 3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Terschelling에서 침몰 중이던 영국 화물선 Pegaway호로부터 구조요청을 받았다. Apr 4, 1938 In heavy sea and stormy weather, the Gustloff reached the Pegaway and rescued all 19 of its crew.
1938년 4월 4일, 거센 파도와 폭풍이 부는 날씨를 헤치고, 구스틀로프는 Pegaway호에 도착하여 19명의 승무원들을 구했다. Apr 10, 1940 Used as a polling station for those Germans in Great Britian who wished to vote on the Austrian annexation question. The polling was done outside of the 3-mile limit of British waters, and voters were taken from and returned to the harbor at Tilbury.
1940년 4월 10일 (38년의 오자인 듯),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안과 관련하여 투표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영국에서 살고 있던 독일인들의 투표소로 사용됨. 투표는 영국 수역에서 3마일 밖에서 실시되었으며, 투표자들은 틸버리 항구에서 실렸다가 그리로 되돌아왔다. May, 1939 The Gustloff sailed with the KdF ships Robert Ley, Der Deutsche, Stuttgart, and Sierra Cordoba, and the non-KdF ship Oceana. They were taking part in the transport of the Legion Condor from Spain back to Germany after the successful defeat of the Republican forces by Franco's Nationalist's.
1939년 5월, 구스틀로프호는 KdF 소속의 Robert Ley호, Der Deutsche호, Stuttgart호, 그리고 Sierra Cordoba호 및 KdF 소속이 아니었던 Oceana호 등과 함께 항해했다. 이들 배들은 프랑코의 극우민족주의자 군대에 의한 공화파 군대 쳐부수기를 성공적으로 도운 뒤, 스페인에서 독일로 귀환하던 "콘돌 군단"의 수송에 동원된 것이었다. May 24, 1939 The ships of the transport fleet arrived in Vigo, Spain, and unloaded large amounts of medical supplies and other materials that were given to the Spanish Social Help organization.
1939년 5월 24일, 구스틀로프호를 포함한 이들 수송선대는 스페인의 비고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의약품 및 스페인 사회 구호 조직들에게 쥐어질 여타 물품들을 하역했다. May 26, 1939 The Legion Condor loaded on the ships of the transport fleet in Vigo harbor. The Gustloff took on 1,405 men.
1939년 5월 26일, "콘돌 군단"이 비고 항에 정박중이던 이들 수송선대의 배들에 탑승했다. 이 배들 중 구스틀로프호는 1,405명을 태웠다. May 30, 1939 The ships, including the Gustloff, arrived in German waters and were escorted into Hamburg harbor by a number of German vessels, including the yacht Hamburg and the armoured ships Admiral Graf Spee and Admiral Scheer.
1939년 5월 30일, 구스틀로프호를 포함한 이들 배들은 독일 수역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요트 "함부르크"호와 장갑함(포켓전함) "아드미랄 그라프 쉬페" 및 "아드미랄 쉐어" 등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함부르크 항에 입항했다. Sept 22, 1939 Commissioned into the Kriegsmarine as Lazarettschiffe "D".
1939년 9월 22일, 독일해군 Lazarettschiffe(병원선) "D"로 명명받았다. Sept, 1939 The first wounded to be taken on board the Gustloff while in its role as a Hospital Ship - wounded from the defeated Polish Army - were taken on in this month.
1939년 9월, 병원선으로 투입된 후 처음으로 폴란드 군과의 교전중에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태웠다. Apr - June, 1940 Served in Norwegian waters, docking in the port of Oslo to take on wounded and sick from the victorious campaign in Norway.
1940년 4월부터 6월, 노르웨이 수역에서 활동했다. 오슬로 항에 정박하여 노르웨이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병이 난 병사들을 태웠다. June 18, 1940 Set sail for Germany from Oslo, Norway, leaving Norwegian waters transporting wounded and sick onboard.
1940년 6월 18일, 노르웨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거나 병이 난 병사들을 싣고 노르웨이의 오슬로 항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Nov 20, 1940 Served as an accomodation ship for the 2.Unterseeboote-Lehr-Division in Gotenhafen.
1940년 11월 20일, 코텐하펜의 2.Unterseeboote-Lehr-Division(제2 잠수함전대?)에서 잠수함 승무원들의 휴식을 지원하는 함정으로 활동했다. (덧붙이자면, 오늘날에도 디젤 잠수함들은 그렇다고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잠수함들은 승무원들이 지내기가 무지무지 열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수함이 기지에 정박할 때에는 목욕이라던가 혹은 편안한 잠자리 등을 승무원들에게 지원해주는 배가 있었다고 하데요. 일단, 독일군에게는 말이죠. 자세한 것은 "U 보트 비밀일기"라는 책을 참조하시기를.) Nov, 1940 - Jan, 1945 The Gustloff was anchored in Gotenhafen and did not leave the harbor for 4 years, serving in various barrack ship and accomodation ship postions within the harbor.
1940년 11월부터 1945년 1월, 구스틀로프호는 고텐하펜 항구에 계속 정박해 있었다. 그 후 무려 4년 동안 그 배는 그 항구를 떠난 적이 없었다. 구스틀로프호는 그렇게 지내면서 병영(내무반)으로서 혹은 잠수함 등의 소형 함정의 승무원들의 휴식을 위한 복지시설을 제공하는 배로서 사용되기도 했다. May, 1943 Served as a barracks ship in Gotenhafen.
1943년 5월, 고텐하펜 항에서 병영(내무반)으로 활용되다. Jan 30, 1945 The Wilhelm Gustloff left Gotenhafen with between 6-8,000 passengers, the majority being refugees. According to the ships own records, the list of passengers on the 30th included 918 Naval officers and men, 173 crew, 373 members of the Woman's Naval Auxiliary units, 162 wounded, and 4,424 refugees, for an official total of 6,050 people. This is according to the official list though, and doesn't take into account the many hundreds of other people that one way or another, were able to make their way onto the seemingly safe decks of the Gustloff. During the night, in blustery icy-cold weather, the Gustloff was sunk (at 2108 01.30.45) in the 2nd worst naval disaster in history. The Soviet sub S-13 hit the Gustloff with a spread of 3 torpedos, sinking it within 50 minutes, with the loss of between 5-7,000 lives. The Admiral Hipper, Löwe, T36, TF19, TS2, M341, V1703, and the steamer Göttingen rescued between 900 and 1,000 passengers from the Baltic Sea. All others perished with the Gustloff.
1945년 1월 30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 거의 대부분이 피난민이었던 - 6천에서 8천명 가량의 승객들을 싣고 고텐하펜 항구를 출발했다.
배 자체의 기록에 따르면, 그 30일 날의 승객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즉 918명의 해군 장교들과 사병들, 173명의 구스틀로프호 승무원들, 373명의 해군 간호 보조 부대원들, 162명의 부상자들과 4424명의 피난민들을 포함, 총 6,050명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기록에 따른 숫자로서, 실상 구스틀로프호의 겉보기에는 안전한듯한 갑판 위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 수 있었던 수백명의 사람들은 일단 제외한 숫자라고 할 수 있겠다.
밤 시간 동안, 세차게 몰아쳐대는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씨 속에서, 구스틀로프호는 역사상 2번째로 꼽힐 정도로 최악의 해난 사고를 당하여 침몰했다. (침몰지점은 좌표 2108 01.30.45) 소련 잠수함 S-13함이 3발의 어뢰를 구스틀로프호를 향해 발사하여, 구스틀로프호는 5천에서 7천명에 이르는 사람들과 함께 50분만에 침몰한 것이다.
순양함 "아드미럴 히퍼"와 Löwe함, T36함, TF19함, TS2함, M341함, V1703함 등의 해군 함정들 및 증기선 Göttingen호가 발트해로 출동, 구조작전에 나서 900명에서 1000명 가량의 사람들을 구해내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구스틀로프호와 운명을 함께 해야 했다.
1941년 6월 22일 오전 03시 15분.
히틀러 총통 명령 "바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 중 하나였던 소련군은 당시 서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한 히틀러 휘하의 나치 독일군에 의해 순식간에 붕괴, 급기야 레닌그라드 (제국시대의 수도이자 중요도시), 모스크바 (수도), 그리고 스탈린그라드(남부지역 중요도시이자 공산당 통치체제 이후 건설된 상징성 높은 신흥도시)까지 후퇴해야 할 정도로 밀렸다.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추위와 독일군측 보급의 문제 등이 소련군에게 호재로 닥쳐왔던 덕에 독일군은 모스크바에서 소련군에게 사실상 처음으로 패배하더니, 급기야 스탈린그라드 그리고 레닌그라드 등에서도 무너지기 시작,
마침내 1943년 6월의 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독일군은 소련 내의 점령지에서 본격적으로 도망치기 시작, 마침내 1945년 1월에는 소련군이 되려 독일 영토로 진격해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소련군의 역공(逆攻)이 본격화 되었을 시점, 독일군 총사령부(OKW)는 소련군으로부터 가장 먼저 피해를 입게 될 동프로이센(Ost-Proisen, East-Prussia)의 독일 시민 400만명을 피난 시키는 것과 관련한 계획을 수립하려 했다.
하지만,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하지 않으려 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나치 독일군이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등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히틀러 주변의 참모들이
"그러한 않좋은 소식을 퍼뜨리게 되면 혼란과 사기저하를 야기하게 된다!"
는 이유로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비밀에 붙였던 것이다.
그 결과, 소련군의 침공으로 철도 등의 육상교통로가 모두 차단된 상태에서 당장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바다 뿐이라는 생각에 동프로이센의 독일인들은 항구도시들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군인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민간인들을 지키거나 보호하거나 혹은 안전한 곳으로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군함과 선박을 피난선으로 제공한 독일 해군(Kriegsmarine)의 도움을 받아 필사적인 탈출을 시작했다.
애당초, 나치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고 레닌그라드 - 모스크바 - 스탈린그라드로 이어지는 부분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었을 당시,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독일의 수뇌들은
"(러시아 민족인) 슬라브족 사람들은 유태인들 다음으로 쓸모가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노예로 쓰기 위한 아주 최소한만 남겨두고 모두 전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고, 그 결과 나치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어있던 시절, 수많은 소련 사람들이 "단지 슬라브족 혹은 (슬라브족보다도 못한) 유색인종 (소련은 원래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임) 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 성폭행, 약탈 등을 당한 상태였다.
당연히 소련군 병사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가족들이 당한 것을 "고스란히 혹은 몇 배로" 독일인들에게 돌려줄 것을 맹세하였고, 그것은 결국 동프로이센 (그리고 나중에는 베를린과 그 주변 지역 및 기타 소련군에 의한 독일 내 점령지역 모두) 에서의 이와같은 비극적인 사태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전쟁 후에도 독일인들, 심지어 이 사건의 피해자들조차 이 사건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자신들이 원자폭탄 및 B-29 폭격기의 융단폭격에 당한 피해에 대해서는 열심히 이야기하면서, 막상 자신들이 다른 나라와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일절 함구해온 일본의 엘리트들과 달리) 독일의 엘리트들은
"히틀러 같은 자를 지도자로 뽑아주고, 밀어주고, 그와 동시에 그를 비판하거나 경계하자고 외치는 자들을 '누군가의 알바'로 몰아 돌을 던진 죄"
에 대해서 가슴깊이 뉘우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그 진정한 속내가 무엇이었을까... 문득 의문이 생긴다만...)
하지만, 타이타닉호의 침몰 때의 피해(1513명)보다 세배 이상 많은 피해를 낸 이 사건은 분명 인류 모두에게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그것도 단지 "많은 희생자들을 냈기 때문"이 아니라,
"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라도 이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특히, 관련 공무원들 및 책임자들의 무책임한 관리와 사후조치 등으로 인하여 2년 전의 "대구지하철화재참사"와 10년 전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등을 겪은 바 있고, 그 후에도 이렇다 하게 개선된 것도 없고 혹은 누군가가 이와 관련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는 커녕 여전히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심지어 그러한 사건들이 당시의 피해자들 및 그 유족들의 마음 속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시점임을 생각할 때,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과 그 희생자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라 본다.
추가 -
DAF = Deutsche Arbeitsfront 1933년 5월 창설. 노동계 장악 목적.
KdF = Kraft durch Freude 1933년11월 설립. 노동자들의 여가시간/활동의 조직을 목적. 바다유람여행, 국민차(Volkswagen)사업 등 추진
출처:독일제3제국의선전정책(데이비드웰시,2001,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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